성령충만하려면(7)
- 참아야 합니다 -
히브리서 6:11~15
Entrance Prayer
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편37:7~9)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은총을 잊지 않으시며, 온갖 생명의 소리들로 풍성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각인의 심령마다 영생의 소망을 주시며, 천국의 복음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지난 날의 찌든 죄악과 허물들은 주의 성령의 태풍으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풍성한 영적 결실들로 무르익게 하옵소서. 복주시기 위하여 거룩한 주일을 허락하셨사오니, 이 날에 하늘로부터 임하는 큰 복을 누리게 하시고, 예배하는 심령마다 염려대신에 감사가, 근심 대신에 행복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Introduction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서폭에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라는 글이 있습니다. “백번을 참으면 집안에 큰 평화가 깃든다”는 말입니다. 현대 가정의 불화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대단한 잘못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가정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소한 것에 참지 못함이 가정의 문제가 되고, 가정의 파탄을 초래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 가정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화목해야 합니다. 그곳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오랜 참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스스로 분을 삭이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자 중에 퇴계 이황(李滉)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분이 며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는 봉화 양반 가문에서 자란 금(琴) 씨였습니다. 이황은 상객(上客)으로 사돈 댁에 갔습니다. 마땅히 그 쪽 집안에서는 이황을 공손히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금 씨 가문에서는 ‘기우는 혼사’였다고 해서 이황을 홀대했습니다. 이황이 사돈댁에서 돌아오려고 하는데 금씨네 친척들이 몰려왔습니다. 이황이 앉았던 마루를 대패로 밀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룻바닥에 대패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기색을 바꾸지 않고 사돈댁을 나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황 선생의 문중에 알려지자 이번에는 문중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돈에게 그런 모욕을 주다니 그것이 양반의 처사냐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이황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문의 명예란 문중에서 떠든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요, 남들이 업신여긴다고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사돈 댁에서 예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나도 예를 갖추지 않는다면 우리 가문이 그들의 가문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새 며느리를 맞아오는 터인데 그런 일로 말썽이 일면 내 집에 오는 새 며느리가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이번 일은 덮어두는 것이 옳다.” (최승범, 퇴계 가훈으로 배우는 인생의 소중한 지혜)
퇴계 이황은 가문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인내, 참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크리스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학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멋스러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내가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그 자체가 위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내하게 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고, 또 성령충만의 유익으로 풍성케 하기 때문에 인내하는 사람에게 평화와 행복이 깃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참는 것이 귀중하다고 합니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참을 인(忍)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있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참고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성령충만과 그 유익을 사모하지 못하고, 수시로 분노하며 살아간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평화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고 인내하므로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분명히 교회는 평화롭고, 행복하며,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조그만 것에 참지 못하고 바르르 떨고 있으니 성령과 성령의 은혜는 떠나고 교회에 평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지옥의 전쟁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고 인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큰 고난이 다가와도,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된다고 해도, 참아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온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 넘치는 행복과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Main Subject
1.
인내란 무엇입니까? 대개의 경우 단순히 오래 참는 것이 인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세가지로 보다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내는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끝까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가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히브리서 6:11)
그리고 12절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 (히브리서 6:12a)
인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닙니다. 퇴계 이황은 분노함을 절제하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낯을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반드시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고, 끝까지 부지런합니다.
성경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갈라디아서 6:9, 데살로니가후서 3: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선(善)”이 무엇입니까? 착한 것이 선입니까? 물론 착한 것은 선입니다. 그것을 악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부지런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게으르지 않는 것이 선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착하긴 한데 너무 게을러…”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우리 주변에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착하긴 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고분고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게을러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입니다. 착하다는 말은 사명에 부지런하다는 말이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착할 수가 없습니다. 게으름은 범죄입니다. 죄악입니다. 악입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착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절대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 게으르지만 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게으름은 결코 착한 것이 아닙니다. 사명에 부지런한 것이 착한 것입니다. 이 일을 감당하게 될 때에는 눈물을 쏟아야만 합니다.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살기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포중앙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따라 합시다. “성령으로 섬기라, 예수로 자랑하라. 경건에 힘쓰라” 여러분 이 사명을 외우고 있습니까? 다시 합시다. “성령으로 섬기라, 예수로 자랑하라, 경건에 힘쓰라” 이 세 가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명에 부지런한 것이 선입니다. 그것이 착한 것입니다. 이 선한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끝까지 부지런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인내’라고 말씀하시고, 이처럼 인내하는 사람에게 축복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넘치는 성령충만의 유익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하여 부지런하십니까? 끝까지 부지런하십니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부터 우리의 신앙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을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명에 부지런한 인내가 없기 때문에 사명에 부지런한 선을 쉽사리 포기하기 때문에 성령충만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수많은 선한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시도하고, 시행해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감당해 보니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낙심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을 함에 있어서 괴로움이 있고, 또 핍박이 있지만 그래도 선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허락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허락하시고, 그로 하여금 마음껏 웃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선을 행함에 부지런함으로 끝까지 감당하는 인내의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 성령충만, 은혜충만 기쁨충만한 축복이 넘쳐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인내는 고난 중에도 끝까지 참고 견디며,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6:12)
이 말씀은 고난 중에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고난이 다가옵니다. 견딜 수 없는 압박이 다가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방해하며 괴롭히는 세력들에 의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 외부적인 압력에 굴하지 않고, 그것은 오래 참고 견디며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가리켜 인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생각하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며 절규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하면서 끝없는 육체적 고통을 호소해야만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침 뱉음과 멸시를 당했습니다. 옷은 벗겨진 바 되고 온갖 수욕에 버려진바 되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23:3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누가복음 23:34)
주님은 그 순간에도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저주의 말을 퍼붓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온갖 고통과 괴로움과 핍박 속에 있었지만 그것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묵묵히 참고 인내했습니다. 털 깎는 자 앞에 양과 같이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용서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참으실 뿐만 아니라 그 원수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은혜를 허락하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더욱 풍성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참고 있습니까? 우리의 지체들이 조금만 실수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눈을 벌겋게 뜨고,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앞에 당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일들에 대하여 참지 못하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참으셨습니다.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게 될 때에 참아야 합니다. 참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를 허락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능력 가운데 역사하시며, 그로 하여금 놀라운 천국의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당한 고난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무서운 고난이라고 해도 주님의 십자가만큼 무겁고 힘든, 그리고 억울한 고난이겠습니까?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당한 고난에 주님을 바라보시므로 기꺼이 참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는 인내는 무작정 참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약속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 14~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6:14~15)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가면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의 약속은 어떤 것입니까? 아들을 주셔서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복을 주고, 계속해서 번성케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시원찮은 약속이 아닙니다.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삭으로 예표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후손으로 오게 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고, 그를 믿는 모든 인류로 하여금 영원한 축복을 얻게 하며, 하나님의 평강을 얻을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되면 즉시 그의 가문에는 축복의 서광이 비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축복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향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없이 많은 고난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약속된 아들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들같이 여기고 고향 땅에서 데리고 나온 조카 롯은 그를 배반하여 떠나갔습니다. 그는 참으로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100세가 되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기다린 것은 바로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랜 기다림의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획의 변화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인내입니다. 이런 인내의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의 충만과 함께 약속이 성취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함으로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기다리며 참아 견딜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의 사람, 그리고 말미암아 천국과 같은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될 것을 권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요,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명에 대하여 인내함으로 부지런해야 합니다. 절대로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모든 고난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인내하신 것처럼 참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어떤 고난이든지 포기하지 않고, 견디므로 믿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허락하시고, 능력 가운데 행복한 생애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인내를 결단합시다. 세상 사람들도 인내하면 행복이 깃든다고 하는데, 주님의 약속이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내합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하므로 그리스도의 샬롬이 온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풍성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enediction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참된 인내의 사람들이 되어 성령충만한 약속의 상급을 풍성케 되기를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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