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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hurch/Shema Isreal

죄수들이 듣더라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행전 16:19~26

Introduction

지구온난화 탓인지, 요즘 날씨는 참으로 짜증스럽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올해 여름처럼 비가 꾸준히 내리고, 또 열대야가 계속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지성 게릴라성 폭우가 쏟아지는가 하면, 불쾌지수는 높아 갑니다. 습도도 높고, 온도도 높습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개운치가 않습니다. 찌뿌드드합니다. 하루 속히 날씨도, 기분도 쾌청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각 교회 예배실황을 살펴보았습니다. 큰 교회는 어떻게 예배가 드려지는지? 그리고 부흥하는 교회의 예배는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각 교회의 예배가 활력을 잃은 듯이 보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성도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만은 제 눈에 비친 예배자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몇 주 전부터 우리 교회의 예배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예배자로서 얼마나 기쁜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인터넷 상에서 보았던 여타 교회의 예배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시무룩한 표정, 무덤덤한 얼굴, 찬송을 부를 때도, 기도를 드릴 때도, 또 말씀을 들을 때에도 아무런 흥분이나 감동이 없이 그냥 시간만을 보내는 듯한 모습입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기쁨을 모르고, 행복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날씨 탓도 있겠습니다만, 그리고 목사님이 재미있게만 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거기에만 원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천국의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예배는 이 천국의 행복을 체험하는 감동적인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면서도 아무런 감동이 없어 보이고, 천국은 고사하고, 죽지 못해 앉아있는 그런 모습들입니다. 한 번 우리가 예배하는 모습을 거울로 비추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무기력하고, 아무런 감동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 속에, 그리고 예배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험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감격이 충만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물에서 막 잡아올린 생선처럼 생기 있게 움직이는 활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는 중에, 성도들과 교제하는 중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웃음이 가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명실공히 천국같이 행복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예수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이렇게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진다는 것이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뜻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업도 잘 되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성공하고, 명성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를 믿으면 이런 복도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덤으로 얻어지는 축복, 또는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말씀하신 그런 복입니다. 축복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고난이 찾아옵니다. 어려움이 왔다고, 고난이 왔다고, 믿으면 행복해진다는 복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도 앞장섰고, 또 다메섹에 있는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이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의 많은 반기독교 운동가들과 전혀 다름이 없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 믿음이 참된 행복임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전도자의 사명을 가지고,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이방 땅을 향해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행복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복을 전해주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풀어줌을, 병든 자에게 고침을 베풀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고,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만사형통이 찾아왔습니까? 아닙니다. 고난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니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부당한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큰 죄인이 되어 감옥 깊숙한 곳에 갇히고, 발에는 착고가 채워졌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만사가 형통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그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억울한 매맞음과 옥살이 뿐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분명히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고난과 함께 동행합니다. 마가복음 10:30절 말씀에 보니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마가복음 10:30)

예수를 믿는 것은 분명히 행복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핍박이 함께 찾아옵니다. 만사형통의 행복이 아니라 고난이 찾아오고, 핍박이 찾아오지만, 그 가운데서도 얻어지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만사형통을 뛰어넘는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믿음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와 같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고난이 찾아오고, 괴로운 일이 찾아오게 되면 이내 행복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고난 앞에 행복을 내던져 버리고, 힘든 일 앞에서 행복을 포기하고 맙니다. 약간의 어려움을 보면서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행복을 상실한 채, 무기력하고, 냉소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립니다. 패배감에 빠진 신앙인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교회에 다니며, 예배에 참여하지만 기쁨을 잃어버린,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 못해 예배하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까? 그렇다고,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진 영생의 기쁨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삶을 향해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깊은 감옥에 갇히고, 매맞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어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치욕과 수치를 당하게 되어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행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힘들고 어려운 중에도 절대로 행복함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시의 형통하지 못함에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2.

바울과 실라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귀신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었습니다. 착한 일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므로 행복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매맞음 뿐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 뿐이었습니다. 칭찬은 고사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이럴 때에는 원망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분노가 생겨납니다. 이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는 울분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행전 16:25)

사도 바울에게도 인생의 밤이 찾아왔습니다. 고난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치와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분노가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원망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분노와 원망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분명히 어떤 순간에도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은 고사하고, 슬프고, 무기력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삶의 무게에 지쳐 원망하고 분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행복을 죽이는 독입니다. 분노는 행복을 파괴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원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혹시 분노가 생겼더라도 하루가 넘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왭니까? 그것이 믿음의 사람에게서 행복을 빼앗아 가는 무시무시한 적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깊은 곳에 수감 된 가운데서 원망과 분노를 쏟아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행복의 비밀이 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고난 중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고난을 이기는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기도하게 되면 고난이 변하여 행복이 되어집니다. 기도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창조하는 열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거룩한 꿈을 꿀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무기력한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영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마귀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찬송했습니다. 여기의 찬송은 기도의 보다 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고난을 이기고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찬송해야 합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찬송으로 인하여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행복을 잃어버린 이유, 행복한 웃음을 웃지 못하고, 침울한 가운데, 혹은 무표정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천국의 축제인 예배에 감격도 기쁨도 잃어버렸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진심으로 드리는 찬송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찬송하며 살아갑니까? 하루의 삶에서 찬송은 몇번이나 부릅니까? 예배시간에 마지못해 부르는 몇번의 찬송이 우리의 찬송의 전부가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옥문이 열리지 않고, 우리의 발을 옭아매고 있는 착고가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찬송을 해야 합니다. 하루 종일 우리의 입에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찬송을 했습니다. 그들의 찬송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속으로 조용히 하는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찬송하게 될 때에 죄수들이 들었다고 합니다. 죄수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찬송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담장을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교회 밖을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의 찬송이 울려 퍼지게 해야 합니다. 길을 걸으면서 우리의 입에서 찬송이 나오고, 그 찬송이 은은히, 그리고 능력있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더 이상은 우리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환경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기뻐하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고 찬송합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을 가득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생명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옥문이 가두지 못하는 힘이 있습니다. 태산과 같은 문제가 깊은 바다 속에 던져지고, 희망의 새 아침을 밝아오게 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우리의 기도와 찬송이 세상 곳곳에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울려 퍼지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안에 기도와 찬송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는 모임마다 성도들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새벽기도에 많은 성도들이 모여와 함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요심야기도 시간에 지축을 흔들고,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 안에 찬양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찬양사역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보다 많은 찬양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찬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유하며,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본문 26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사도행전 16:26)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힌 신세였지만, 그들은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문들이 다 열렸습니다. 그들의 매인 것이 다 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도와 찬송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은 고난 중에도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고, 예배에 생동감을 더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기쁨 없는 예배를 드립니다. 감동이 없는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죽을 맛입니다. 목사가 전화를 하니 어쩔 수 없이 나오고, 교회에 안 나가자니 불안해서 나옵니다. 그러나 감동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마지 못해 끌려 나오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게 억지로 하는 것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도록 부르심은 우리를 귀찮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청취하도록 하신 것이 우리에게 멍에를 지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감옥에 갇히게 하고, 우리의 두 발을 착고에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불행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면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마지못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습니다. 설교가 빨리 끝나고, 예배가 빨리 마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니 두 눈에는 생기를 잃고, 얼굴에는 기쁨이 없고, 심령에는 감격이 찾아들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찬송소리는 옥문을 너머 다른 죄수들에게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기적이 나타나고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감동이 있는 신앙생활을 소망해야 합니다. 행복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기대해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이 우리의 신앙을 기적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만들 것입니다. 옥문을 열고, 착고를 풀어 자유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기도와 찬송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예수 믿으면 행복하다고 말해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행복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왜 행복이 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고난 때문에, 힘든 일들 때문에 우리의 삶에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난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염려거리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만사 형통이 아니어서 행복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와 찬송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 기도가 있고, 찬송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의 담장을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소리를 교회의 담장을 넘겨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 기도소리가 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길을 걷는 중에도 우리의 기도소리가 잔잔히 퍼져나가야 합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대중을 시끄럽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모습,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교회의 담장을 너머 세상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뿐 아니라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의 입술에는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성가가 흥얼거려져야 합니다. 길을 걸으면서도 잔잔히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고, 하루에 몇 십분이라도 조용히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소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의 귀에 들리고, 직장 동료의 귀에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 놀라운 행복이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합시다. 찬송합시다. 그 모습과 그 소리가 세상에 들리게 합시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삶이 만사형통이 아니고,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이, 착고를 차고 있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옥터를 흔들고, 착고를 풀어주시는 기적과 같은 행복을 누리고, 그 감격 속에 늘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축 처진 모습으로 교회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 가볍게 주님을 향해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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